평일 새벽마다 대표님과 산을 탔다. 하산하고 씻고 바로 출근했다. 이 강행군을 이번 주 삼일 연장으로 했다. 일출 명소를 취재하라는 클라이언트 지시 때문이었는데, 오기 반 독기 반으로 진짜 해버렸다. 구태여 대표님까지 대동한 이유는요. 나 혼자 가면 억울하니까요. 직원들을 새벽부터 대동할 수 없진 않은가. 회사일 때문이라는데 대표님과 꼬옥 함께하고 싶었다. 가자고 하면 가주실 줄 알았거든.(감사해요. 죄송함다.) 이번 화는 기록용 에피소드다. 일기라고 생각하고 읽어주길.
↑흑성산 일출 실패 현장
1일차 흑성산, 사서 고생이란 말은 이런 때
새벽 1시에 깼다. 본디 예민한 나란 인간, 일 걱정 있는 날에는 잠을 설친다. 숱한 등산러들 블로그를 뒤져보니 흑성산전망대까지 등산은 15분 정도의 산책 수준이라고 했으나, 머릿속에 온갖 변수 시뮬레이션을 돌려 새벽 6시에는 등산을 시작해야 한다는 결론에 다다랐다. 뜬눈으로 밤새고 새벽 5시부터 대표님을 채근해 목적지로 향했다. 오랜만에 발동한 객기였다. 우선, 흑성산중계소까지 차로 이동했다. 헤드라이트에만 의지해서 좁고 가파른 산길을 오르는데 대표님이랑 나랑 완전 쫄아서 가는 내내 아무말이나 했다. 중계소에 주차를 하고 시간을 보니 본인 의지대로 6시 무렵이었다. 문제는 중계소에서 전망대까지 걸어서 15분이라는 점. 너무 빨리 도착한 거다. 추워도 목적지에 먼저 가서 대기타고 싶었는데(2번째 객기 발동) 날이 미치게 추운 거다. 일출 기다리다가 얼어 죽기 십상인 날씨였다. 이번에는 대표님 말 들었다. 차에서 시간 좀 죽이다 산을 올랐다. 흑성산은 진짜 별 거 없었다. 낙엽 때문에 무지 미끄러운 거 빼고는. 일출은 못 봤다. 구름이 잔뜩 껴서 일출은 개뿔. 내가 할 말 없는 게, 날이 흐릴 거란 걸 미리 알고는 있었다. 이것도 무슨 객기였는지. 무튼 1일차 완료.
↑돌이켜보면 무난했던 태조산
2일차 태조산, 도르마무 도착까지 10분
어김없이 새벽 5시에 나갈 채비를 하는 중이었다. 추리닝 가지러 안방에 살짝 들어갔는데, 아들래미(두살배기)가 침대에 꼿꼿이 앉아서 나를 애처롭게 쳐다보고 있었다. 죽어도 못 보낸다는 아들과 기어코 가야 한다는 어미 그 사이에 골치 아픈 아버님. 생이별 난리 부르스를 떨다가 5시 반에 대표님 차에 탔다. 어제 등산길 미끄러운 걸 실감하신 대표님은 장비를 하나 챙겨오셨는데, 대걸레 자루 분질러 등산스틱을 만들어오셨다. 정성 하나는 인정. 무튼 청송사에 도착해 차에서 내려 둘 다 너무 자연스럽게 직진했다. 뭘 믿고 등산로라고 확신을 한 건지. 30분 정도 엄한 곳 헤매다가 겨우 원점으로 와서 제대로 된 길로 들어섰다. 이미 시간이 많이 지체되어 마음이 급했다. 컴컴한 산길을 바삐 걷는데, 그 시간에 이미 등산하고 내려오는 분들이 꽤 됐다. 한국인들 참 부지런하다. 등산 도사 같은 남성분께 태조산 해맞이광장까지 얼마나 걸리느냐 물으니 15분이면 된단다. 그 말에 한껏 신나 열심히 산 탔다. 근데 아무리 가도 도착 기미가 없었다. 내려오는 중년 부부께 똑같은 질문을 하니 10분이면 도착한다대. 잉? 아까 15분이라며. 무튼 갸우뚱하며 계단 코스에 진입했는데, 진심 목에서 피 맛봤다. 너무 힘든 거다. 내 속도로는 일출을 놓칠 것 같아 대표님 먼저 보내고 내려오는 분께 호소하듯 또 물어봤는데, 아나 또 10분이래. 천만다행이도 그 분은 찐이었다. 살짝 혼절하기 직전에 목적지 입성. 일출도 성공.
↑사람 미치게 하는 197m (포기 종용)푯말
3일차 광덕산, 천국 다녀오다
이만하면 됐지 않느냐는 대표님의 볼멘소리를 귓등으로 듣고 강행했다. 여기까지 왔는데 끝을 봐야 했다. 광덕산 초입에서 후회했지만. 요약하자면 무자비한 여정이었다. 비탈진 산길을 헥헥거리며 통과하면 계단 코스가 나오는데, 이것이야말로 천국의 계단. 끝이 안 보였다. 체감상 태조산 전체 코스가 광덕산 계단 코스 보다 쉬울 정도. 초장부터 해도 너무했다. 서너 번 숨을 고르며 겨우 팔각정에 진입해 표지판을 확인했는데 좌절. 이렇게 올랐는데 1.3km나 남았단다. 무참하게 희망이 꺾인 채 계속 산을 탔다. 내리막은커녕 평지 하나 없다. 오르막, 계단, 오르막, 계단 무한 반복. 태조산 오를 때 숨지겠다 싶었는데 광덕산은 천국 두어 번 다녀온 듯하다. 후반부쯤 대표님과 격차가 꽤 벌어져 나 홀로 싸움에 돌입했다. 블로그에서 봤던 마지막 암벽 코스를 오르고 올랐다. 이미 해는 떠있었고 대표님만큼은 일출을 놓치지 않고 찍고 있길 바랐다. 정신이 혼미해서 아무 생각도 없을 즈음 정상까지 230m라는 푯말을 보고 화색했다. 그리고 또 한참을 올라 정상 부근이겠거니 생각했을 때 푯말을 확인하니 197m. 광덕산 미친 건가. 세상이 나를 억까하나. 포기할까. 생각했으나, 나는야 객기 여왕. 결국 정상 찍었다는 해피엔딩. 광덕산 즐거웠고, 다신 보지 말자.